인연을 엮는 우연과 필연

이동용 (수필가/철학자)



앞을 내다보면 다 우연처럼 보여도, 뒤를 돌아보면 다 필연처럼 보입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어쩔 수 없었고, 그래서 이 길을 걸어왔던 것입니다. 다른 길이 보이기도 했지만, 이 길 하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야 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취할 수는 없었습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나의 인생길이 되었습니다. 나라는 인간의 인생이 이런 여정 속에서 현상으로 드러났습니다. 나의 현상입니다. 눈에 보입니다. 아련하기도 하고 현란하기도 합니다.


“이,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닌지도 몰라요.” 


한강의 검은 사슴을 다 읽고 나서 덮으려 할 때 이 구절이 심연 위의 윤슬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중반을 지날 때였습니다. 장미 가시덤불처럼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헤쳐 나가던 중이었습니다. 나팔꽃 줄기처럼 힘주면 끊어질 듯 여린 모습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질긴 장미 줄기였습니다. 빠져 나가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독서의 발걸음에 하염없이 달려드는 그 줄기들의 힘은 무시무시할 정도였습니다.


함부로 떼 내려 하면 가시에 찔릴 수도 있었습니다. 조심해야 했습니다. 모든 글들은 만만찮았습니다. 


탄광, 폐광, 폐사택촌, 폐광촌, 광업소, 광원들, 갱도, 갱목, 사갱 입구, 막장, 광산사고, 죽탄, 진폐 등 일련의 개념들을 무리 없이 엮어낸 노련한 글들을 읽어가며 경이로움까지 느꼈습니다. 


이런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을까. 얼마나 신경을 쓰며 말들을 모았을까. 그 노력과 정성을 확인할 때마다 시간 보내기라는 축제를 펼쳤습니다.


검은 땅, 검은 산, 검게 펼쳐진 폐광촌의 하늘, 검은 물, 검은 그물, 검은 탄차들, 검은 몸, 검은 얼굴, 검은 사람의 눈, 검은 땅의 사람들, 검은 빛깔, 검은 스웨터, 검은 사슴, 검은 날짐승들, 검은 음부 등, 마치 비너스의 동굴을 찾아가는 탄호이저의 방황과 노력을 감지할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듯이, 높은 곳, 그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속을 가득 채운 숱한 개념들이 별들처럼 선명하게 빛의 형식으로 박혀 있음을 확인합니다.


위와 아래가 수시로 뒤바뀌는 현상을 주목했습니다. 


별이 바람에 스칠 때 윤동주는 괴로움을 느꼈듯이, 한산했던 섬에서 들풀이 바람에 스칠 때 이순신이 애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듯이, 어둠 속에서 사라져간 생명의 이야기를 엮어가며 모로 누워 두 주먹으로 명치를 눌러대던 작가 한강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질식해서 죽어간 생명들, 그들이 죽어갈 때 든 생각은, 그 생각을 엮어가는 작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외면하지 않기. 외면하지 않으리라. 이런 다짐이 글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멋지게 보이려고 애를 쓰지 않았습니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내버려두었고,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방치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격한 감동을 유발했습니다. 


팔십년대 이야기, 나 또한 그 시대에 젊음을 보낸 사람이라 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나도 신문이나 뉴스에서 광산 사고 소식을 접한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아직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갖추기 못했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했고 들어도 듣지 못했습니다. 생각은 다른 것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습니다.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보물을 바라보기에 급급했습니다. 서로 다른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서로 다른 말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야 그때 내가 외면하며 지나쳤던 사물들을 다시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반성하는 마음도 함께 따라줍니다. 지금이라도 그런 사물들을 보려하고 또 볼 수 있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침묵이 시간을 이끕니다. 시간이 침묵 속에서 흘러갑니다. 무엇이 주체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몇 날 며칠을 한강이 만들어놓은 글들을 떠올리며 수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많았던 시간들을 주목하면서 오늘도 여전히 새로운 길을 걸어갑니다.


작성 2025.09.15 10:35 수정 2025.09.1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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