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위의 수목원, The Arboretum on Paper

천리포수목원 국가등록문화유산 등재 기념 전시

2,727평의 황량한 땅에서 세계적 수목원까지… 민병갈이 남긴 기록과 나무의 시간

전시기간 : 2026.07.03 ~ 2026.10.11

한 사람이 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그날의 날씨와 기온, 나무의 이름과 심은 자리까지 기록했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쌓인 기록은 수천 장이 되었고, 작은 해안의 야산은 세계가 주목하는 수목원이 되었다.

 

충남 태안 천리포 바닷가에 자리한 천리포수목원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국 이름 민병갈(閔丙渴, Carl Ferris Miller, 1921~2002)​이 있다.

 

민병갈, 전시장 재 촬영

오늘날 천리포수목원에는 1만6천여 분류군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특히 926분류군의 목련과 566분류군의 호랑가시나무 컬렉션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힌다. 그러나 이 거대한 수목원의 시작은 놀라울 만큼 소박했다.

 

바다가 좋아 매입한 2,727평의 땅

미군 해군정보장교 출신이었던 민병갈은 광복 후 미 군정청을 통해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한국의 자연에 매료된 그는 서해안을 즐겨 찾았다. 그러던 중 만리포 일대를 오가다가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천리포 해안 절벽 위의 땅을 발견했다. 곰솔 몇 그루와 잡목이 자라는 황량한 야산이었다.

 

1962년 그는 이곳 2,727평을 매입했다.

 

처음부터 수목원을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아담한 한옥을 짓고 자신이 좋아하는 꽃과 나무를 심으며 살아가는 소박한 농원을 꿈꿨다. 더구나 당시 민병갈은 식물에 관한 전문지식도 거의 없었다. 어떤 나무를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조차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전국의 산과 들을 찾아다니며 자연을 공부했다.

 

그가 천리포에 첫 삽을 뜬 것은 땅을 구입한 지 8년이 지난 1970년 봄이었다. 나무를 심은 날, 기록도 시작됐다. 민병갈의 특별함은 나무를 심었다는 데만 있지 않다. 그는 나무를 심기 시작한 날부터 기록하기 시작했다.

 

기록 일부, 전시장 재촬영

 

1970년 봄부터 작성한 초기 업무일지에는 인근 대뱅이섬에서 캐 온 후박나무와 참식나무, 동백나무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세 종류의 나무에서 시작한 기록은 이후 10년에 걸쳐 무려 2,675장의 업무일지​로 이어졌다. 날씨와 기온은 물론 해외에서 들어온 식물 종자의 목록, 나무를 심은 위치, 방문자의 이름, 국내외 거래 내용까지 빠짐없이 적었다. 손으로 식재 위치도를 그리고 식물마다 이력카드를 만들었다. 

 

평일에는 서울에서 일하고 주말이면 천리포를 오가는 생활 속에서도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기록은 단순한 메모가 아니었다. 오늘 심은 한 그루의 나무가 내일 어떻게 살아갈지를 확인하기 위한 약속이었다. 1976년부터 작성된 식물 이력카드만 1984년까지 약 8,000장에 이른다. 이 기록들은 훗날 천리포수목원 식물 데이터베이스의 토대가 되었다.

 

민병갈이 직원들에게 자주 했다는 말이 있다.

 

“나무를 지켜만 주고, 주인 노릇 하지 마라.”

 

이 짧은 한마디에는 자연과 식물을 바라보는 그의 철학이 압축되어 있다.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잠시 곁에서 돌보고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존재라는 생각이다.

 

그는 제주도와 완도, 변산반도, 울릉도 등을 직접 누비며 식물을 채집했다. 온실에서는 토양 배합과 파종법을 실험하고, 식물 한 종 한 종의 성장 과정을 기록했다.

 

1976년부터는 자체 식물 탐사팀을 꾸려 야생 종자를 채집하고 자생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8년 완도호랑가시나무의 발견과 품종 등록 과정은 민병갈이 단순히 수목원을 운영한 사람이 아니라 현장을 누빈 식물 연구자였음을 보여준다.

 

세계와 연결된 천리포

 

민병갈의 시선은 천리포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해외의 식물 서적을 구해 독학했고 미국호랑가시학회에 가입했다. 1975년 영국 왕립원예학회, 1977년 국제수목학회, 1979년 국제목련학회 등에 잇따라 참여하면서 세계 원예계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미국 농무부와 뉴욕식물원, 영국 힐리어수목원 등 해외의 주요 식물 기관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종자를 교환했고 희귀 식물을 천리포로 들여왔다.

 

교류는 일방통행이 아니었다. 그는 완도호랑가시나무를 비롯한 한국의 고유 식물을 국제사회에 소개했다. 세계의 식물을 한국으로 가져오는 동시에 한국의 식물을 세계에 알린 것이다. 그 결과 1989년 영국 왕립원예학회는 민병갈에게 비치 메모리얼 메달(Veitch Memorial Medal)​을 수여했다.

 

2000년에는 천리포수목원이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아시아 최초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았다.

2,727평의 황량한 야산에서 시작한 공간은 그렇게 18만 평 규모의 세계적인 수목원으로 성장했다.

 

한 명의 어메리칸_한국인이 남긴 ‘우리의 유산’

 

민병갈은 1979년 한국으로 귀화했다. 그리고 200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천리포의 나무 곁을 지켰다. 그가 남긴 것은 수많은 나무만이 아니다. 토지매입증서와 업무일지, 식물 채집·번식·관리 기록, 손으로 그린 식재도, 식물 이력카드, 세계 각국의 식물 기관과 주고받은 편지까지 수십 년의 시간이 종이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래서 천리포수목원은 어쩌면 ‘땅 위에 세워진 수목원’이기 전에 ‘기록 위에 세워진 수목원’​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는 2026년 국가유산으로 등재된 천리포수목원 조성 관련 기록물을 처음으로 공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 개인의 메모였던 기록이 반세기를 지나 우리 모두가 보존해야 할 공동의 기억이 된 것이다.

 

기록 위에서 자라는 미래

 

민병갈은 처음부터 거대한 수목원을 계획하지 않았다. 바다가 좋아 땅을 샀고, 나무를 몰라 산을 다니며 공부했다. 나무를 심으면서 기록했고, 기록하면서 다시 배웠다. 그렇게 하루가 쌓여 10년이 되고, 10년이 쌓여 세계적인 수목원이 되었다.

그가 남긴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천리포수목원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기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 그루를 심고, 한 줄을 기록하고, 다시 한 그루를 심었던 시간의 축적이다.

 

나무의 나이테가 지나온 계절을 기록하듯 민병갈의 업무일지와 식물카드는 천리포수목원이 지나온 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오래된 종이 몇 장이 아니다.

 

한 사람이 평생 나무와 나눈 대화이며, 한 사람의 기록이 어떻게 한 시대의 유산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역사다. 천리포수목원은 나무 위에 시간이 쌓이고, 기록 위에 미래가 자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이다.

 

전시장 일부, 사진 이정우
작성 2026.08.18 11:21 수정 2026.08.18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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